[중부일보] [경기도 전통사찰] 해외 미술랭 스타셰프들도 반한 'K-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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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이천 감은사
◇ 사찰음식 명장의 두부 요리는 어떨까=최근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최종 라운드의 미션은 ‘두부’를 주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두부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도 창의적이고 만든 의도가 분명한 음식이 심사 기준이었다. 도전자들의 가지각색 두부 요리를 보면서 절집의 두부 음식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두부는 세속의 동물성 식품을 대체하는 필수 단백질 공급원이다. 해서 한국 사찰의 두부 음식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조계종 지정 사찰음식 명장 우관스님도 숱한 두부 음식을 선보여 왔다. ‘시금치 두부 현미죽’, ‘두부구이 뿌리채소 찜’, ‘묵은지 두부말이’. ‘오가피 순두부 무침’, ‘애호박 두부 양념 찜’, ‘오미자효소 두부구이’…. 낯선 듯 익숙하고, 익숙한 듯 낯선 스님 표 두부 일미다. 스님이 흑백요리사의 도전자였다면 두부 미션에서 승승장구하지 않았을까?
◇ 일상식이 ‘약식’으로 거듭나는 스님 비법=지난 5일, 우관스님이 주지로 있는 이천 감은사에서 ‘제16회 감은사 마하연 사찰음식 문화 한마당’이 열렸다. 행사의 포문을 연 사찰음식 시연에서 우관스님이 선보인 음식은 ‘두부구이 우엉 간장조림’이었다. 스님은 "가을을 맞아 제철 식재료이자 영양분이 풍부한 뿌리채소인 우엉을 주재료로, 누구나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라고 선정 이유를 덧붙였다.
스님의 야외 조리대 앞에 모여든 손님들은 ‘일일 사찰음식 수강생’이 되었다. 실제로 이날 손님 중엔 지난 여름 경기도와 이천시가 주관한 2024년 전통문화 특화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린 우관스님의 사찰음식 강좌 수강생들이 있었다. 김경희 이천시장을 비롯해 이천시 마장면 주민들과 스님의 오랜 도반들도 자리했다.
"맛과 향을 낸다고 일부러 간장을 태우기도 하죠? 절에선 태우지 않고 재빨리 볶아내 본연의 맛을 살립니다. 간장도 화학 첨가물이 들지 않은 집간장이 좋겠죠."
스님은 조리 과정 틈틈이 팁을 전하면서도 노련한 손길로 금세 음식을 완성했다. 노릇하게 부친 두부 위에 볶은 우엉채가 풍성하게 올라가 먹음직스러웠다.
◇ 만들고 먹는 모든 과정이 수행=스님 손에 뚝딱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간단한 과정은 아니다. 우엉은 칼등으로 일일이 껍질을 벗기고, 떫은맛 제거를 위해 물에 잠시 담가뒀다가 곱게 채를 썰어야 한다. 불을 올리기 전 준비 과정도 이렇게 번거로운데 조림 양념인 간장과 조청, 매실액까지 직접 담근다고 생각하면 그 수고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음식이나 식재료를 구하고 다듬어 조리해 접시에 올리기까지는 무수한 정성이 깃든다. 불가에선 이 모든 과정이 ‘수행’이다. 우관스님이 나물을 ‘캐지’ 않고 ‘뜯으며’, 24절에 맞춰 재료를 조리하는 것은 ‘생명을 내 몸처럼 여기는 자비관’ 때문이다. 그렇게 만든 음식은 곧 약식(藥食)이 되고 그것을 먹는 것까지를 수행으로 본다. 하여 어느 절이나 공양간에는 양 전 외는 게송인 오관게(五觀偈)가 곳곳에 쓰여있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 깨달음을 이루고자 / 이 공양을 받습니다.’
◇ 절밥이 이렇게 맛있었나?=시연이 끝나고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 ‘만발공양(萬鉢供養)’이 시작됐다. 스님만의 조리법과 손맛으로 완성된 음식이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모둠채소 된장 양념 무침’, ‘도라지 유자청 생채’, ‘두부구이 우엉간장조림’, ‘과일 말랭이 고추장무침’, ‘비트 연근조림’, ‘토란대 들깨가루볶음’, ‘꽈리고추찜 양념버무리’, ‘고사리 들깨가루볶음’, ‘가지 간장양념볶음’, ‘마른제피잎 견과류볶음’, ‘참외장아찌’ 등 그 종류는 15가지에 이르렀다. 황송한 공양이다. 절집서 차려낸 세상 제일의 약식 뷔페가 아닌가.
땅, 물, 햇빛, 바람, 불 그리고 지극한 마음이 만든 음식을 대충 씹어 넘길 수 없다. 속세에서 오만 자극에 물든 마음과 혀끝을 음식으로 정화하듯 한 입 한 입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진다. 사찰음식에는 화학조미료는 물론이고 자극적이고 냄새가 강한 오신채(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를 넣지 않는다. 해서 대개는 사찰음식을 두고 ‘슴슴하다’고 하지만 이는 속세의 맛에 중독된 이들의 표현일 것이다. 음식을 가만가만 씹다 보니 어느 하나 심심함 없이 달고, 쓰고, 알싸하고, 또 고소하다. 그렇게 곱씹다 보니 문득 음식도 자아(自我)도 우리가 본질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나왔나 싶다.
◇ 보리일미, 깨달음의 한 맛=우관스님은 테이블을 돌며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스님이 주관한 산사의 가을 잔치 덕에 법당 한 채 있는 고적한 절집은 오랜만에 복작댔다. 매년 가을의 문턱에서 사찰음식을 나누는 이 특별한 행사는 어느덧 16년째 이어지고 있다. 우관스님은 ‘나눔의 맛’을 중시한다. 인연이 닿는 누구에게라도 사찰음식을 소개하고 맛보여주고 싶단다. 자비로 음식을 베풀기 위함만은 아니다. 스님이 추구하는 음식이 보리일미(菩提一味)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어인 ‘Boddhi’를 음역한 보리는 ‘깨달음’을 뜻하고, 일미(一味)는 ‘한 맛’으로 ‘한’은 ‘모든 것을 통섭하는 큰 한 가지’란 뜻을 담는다. 그래서 보리일미는 ‘깨달음의 한 맛’이다. ‘보리일미’라는 스님의 지향점은 ‘먹방’과 자극적 음식이 난무하는 시대에 쾌락이 아닌 깨달음으로서 음식을 대하는 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 명장의 텃밭은 아낌없이 주는 도락산=우관스님은 2022년 조계종이 지정한 사찰음식 명장이 되기 전부터 손맛 좋기로 유명했다. 감은사 경내에 설립한 마하연사찰음식문화원의 원장으로,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의 사찰음식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사찰음식 강의를 숱하게 맡았고 ‘우관스님의 손맛 깃든 사찰음식’, ‘우관스님의 사찰음식 보리일미’ 등의 저서를 펴냈다. 또한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한국을 대표해 사찰음식 전시와 시연을 선보이며 국제적 명성을 쌓았고 이제는 해외 미슐랭 스타셰프들이 스님에게 음식을 배우려고 우리나라를 찾을 정도다. 우관스님의 주방이자 식재료의 원천은 감은사를 품은 도락산이다.
"이천에선 절마당에서 보이는 도드람산이 유명하지만 제게는 감은사를 감싼 이 도락산이 1경입니다."
스님은 2007년 이천 감은사에 들어온 이후부터 도락산 아래서 줄곧 농사를 지었다. "수행자라면 응당 내 음식은 내가 만들어야 하고 그것 또한 수행"이라고 말하는 그는 식재료부터 직접 기르고 자연에서 무심히 난 것들을 쓴다. 스님의 텃밭에선 배추, 무, 옥수수, 토마토, 고추, 가지, 오이 등 갖은 채소가 여름, 가을 탐스럽게 여문다. 봄에는 머위, 오가피나무 순, 두릅 순, 냉이, 질경이, 쑥, 취 등 지천에서 자유로이 돋은 새순과 나물을 뜯는다. 산과 밭이 비는 겨울에도 걱정은 없다. 스님의 저장고 안에는 삼계절 동안 바지런히 갈무리해 둔 각종 묵나물과 김치, 장아찌가 가득하다. 해서 스님의 음식을 가만히 바라보고 천천히 음미하면 수행자의 사계절이 읽힌다. 사철의 변화를 몸소 느끼며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일 테지만 또 가장 어려운 삶일 테다.
◇ ‘사찰음식’으로 일렁이는 한식의 새로운 바람=이날 행사에선 ‘사찰음식 향적 전시마당’이 열려 만발공양에서 선보인 음식 외에도 다양한 사찰음식이 전시됐다. 우관스님은 방문객에게 음식을 소개하고 레시피도 공개했다. 스님이 ‘쉽고 간단한 사찰음식’으로 추천한 음식은 ‘도라지 유자청생채’와 ‘마른제피잎 견과류볶음’이다.
도라지 유자청생채는 소금과 식초에 살짝 절인 도라지를 유자청에 무치면 되는 간단한 요리다. 쌉싸래한 도라지와 새콤달콤한 유자청이 어우러져 샐러드처럼 먹기 좋다. 마른제피잎 견과류볶음은 조청에 조린 달콤한 견과에 제피잎을 섞은 다음 소금으로 간을 한 음식이다. 알싸한 제피향이 미각을 자극하는데 제피가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살균작용을 해서 건강에도 유익하다. 스님은 두 음식을 유럽인들도 매우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우관스님과 그의 사찰음식 덕분에 해외에 ‘K-FOOD’로 소개되는 한식이 더욱 풍성해졌다.
감은사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선선한 가을 날씨와 함께 무르익었다. 스님의 융숭한 대접은 만발공양에서 끝나지 않고 꽃차 시음, 연잎밥 만들기 체험, 삼색전 시식, 원두커피 시음 등으로 이어졌다. 쌀과자를 접시 삼아 갓 부친 따끈한 전을 받아먹고 맨드라미차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까지 마셨더니 과식했나 싶을 정도로 배가 불렀다. 직접 만든 연잎밥은 현장에서 먹지 못하고 가방에 넣었다. 식탐만 부린 듯 해 부끄러운 한편 그저 감사한 마음에 불전과 도락산을 향해 꾸벅 인사를 드리고 왔다.
유승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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