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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프랑스 요리 장인이 한국 사찰에서 음식을 만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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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불교문화사업단
댓글 0건 조회 2,405회 작성일 23-04-0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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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프랑스 정찬 요리를 만들어 온 프랑스인 셰프가 낯선 한국의 사찰에서, 한국 채소와 양념으로 만드는 음식은 어떤 맛을 낼까

지난 3월 30일 서울 은평구 진관사는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 채비로 살짝 분주했다. 1700년째 한국 사찰음식을 보존·계승하고 있는 사찰답게 방한하는 국빈급 인사들의 방문이 잦은 이곳을 찾은 손님은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로 꼽히는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의 교장 에릭 브리파였다. 프랑스의 국가 공인 장인 ‘MOF(Meilleur Ouvrier de France)’인 스타 셰프. 여느 방문객이라면 사찰음식을 맛보며 템플스테이를 체험하는 정도였겠지만 이날은 조금 달랐다. 진관사 회주인 사찰음식 명장 계호 스님이 대표적인 메뉴 몇 가지를 만들고 함께 맛본 뒤 같은 재료를 가지고 브리파 셰프가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요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요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계호 스님과 브리파 셰프는 두부찜을 곁들여 차를 마셨다. 진관사 두부는 조선시대 전통 방식을 지켜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두부 위에 프랑스어로 행복(bonheur)이라는 글자를 미나리 줄기로 새겨놓은 걸 본 브리파 셰프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계호 스님은 “사찰음식에서 최고의 재료와 양념은 다름 아닌 ‘좋은 마음’”이라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나쁘면 맛있는 음식이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요리는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화답한 브리파 셰프는 “45년 이상 음식을 만들어왔는데 오늘 스님에게 다시 요리를 배우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계호 스님(왼쪽)과 에릭 브리파 셰프가 함께 민들레 겉절이를 만들고 있다

계호 스님(왼쪽)과 에릭 브리파 셰프가 함께 민들레 겉절이를 만들고 있다

조리실이 마련된 보문원으로 브리파 셰프를 안내한 계호 스님은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가는 맷돌로 향했다. 맷돌을 돌려 콩을 갈면서 두부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계호 스님이 설명하자 그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맷돌과 불린 콩을 살펴봤다. 맷돌 앞에 스님과 앉아 맷돌 자루를 돌려 보던 그는 “35년 이상 두부를 즐겨 먹어 왔는데 이렇게 직접 손으로 두부 만드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며 “참신한 충격”이라고 말했다. 맷돌에서 갈려 나오는 콩을 그가 맛보려 하자 계호 스님이 “그냥 먹으면 비려서 안 된다”며 황급히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이를 지켜보던 스님과 신도들 사이에선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리대 위에는 봄을 알리는 나물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가죽나물, 민들레, 쑥, 머위, 씀바귀, 두릅, 표고버섯, 애호박, 당근, 홍고추, 청고추가 저마다 향긋한 봄기운을 풍겨댔다. 조리대 가운데의 작은 옹기에는 조청, 매실청, 깨, 참기름, 죽염, 고춧가루, 실고추, 흑임자, 식초, 고추장, 된장, 간장 따위의 양념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미리 만들어 말려둔 가죽부각도 있었다. 계호 스님과 함께 재료를 살펴보던 브리파 셰프는 일일이 채소 잎을 뜯어 씹고 향을 맡았으며, 양념도 손등에 하나씩 덜어 맛을 봤다. 민들레를 집어 들고는 “어릴 때 자랐던 고향 뒷산에서 많이 뜯었다”며 반가워했다.

계호 스님이 이날 선택한 메뉴는 민들레 겉절이, 가죽전, 오색두부조림이었다. 배를 깎아 강판에 간 뒤 간장과 매실청, 죽염, 참기름, 깨소금을 넣어 양념장을 먼저 만들었다. 다듬어 잘라놓은 민들레에 양념장을 둘러 쓱쓱 무쳐냈다. 쌉쌀하고 깔끔한 민들레 겉절이가 침샘을 자극하며 입맛을 돋웠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무쇠 솥뚜껑 팬을 달구면서 밀가루에 죽염을 넣어 반죽을 만든 계호 스님은 가죽나물에 재빨리 튀김옷을 입혀 팬 위에 부쳐냈다. 이어 두부를 3㎝ 정도 크기의 정육면체로 썰어 팬에 노릇하게 구운 뒤 칼집을 내고는 버섯, 호박, 당근, 고추 등 가늘게 채 쳐놓은 채소를 칼집 속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나름 세심한 기술이 필요한 메뉴다. 이를 지켜보며 따라 하던 브리파 셰프는 “손이 커서 예쁘게 안된다”며 웃었다. 채소를 넣은 두부 조각은 채수와 간장, 조청을 넣고 졸이듯 끓여 완성했다.

스님 곁에서 돕던 브리파 셰프는 죽염에 대해 “프랑스에서 사용하던 소금과 비교할 때 상당히 강한 맛이 난다”고 했고, 조청을 맛보고 난 뒤 “독특하고 색다른 단맛이 기분 좋다”고 했다. 그는 이어 조리대 위에 놓인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가리키며 “지금이야 대부분 인덕션을 사용하고 있겠지만 사실 이렇게 직접 조절할 수 있는 불을 사용해야 진짜 요리하는 기분이 난다”고 덧붙였다.

점심 공양(식사) 후에 브리파 셰프는 스님과 함께 채마밭에서 표고버섯을 땄다. 그는 “이렇게 생긴 버섯은 처음 보지만 프랑스에서 나는 세프(Cepe)버섯과 굉장히 비슷한 풍미가 난다”고 말했다. 어떤 음식을 만들 생각인지 묻자 그는 “지금의 계절과 자연을 최대한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또 “스님의 요리를 보면 재료나 디테일이 간단하고 자연을 따른다는 단순한 원리일 뿐인데, 곱씹어 볼수록 어렵다”면서 “계절의 개념이 없이 요리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이런 원리를 가르치고 싶다”고 말을 이었다.

(왼쪽 위부터) 계호 스님이 만든 오색두부조림, 민들레 겉절이, 가죽전.(오른쪽 위부터) 에릭 브리파 셰프가 만든 애호박 샐러드, 민들레 샐러드, 버섯두부구이

(왼쪽 위부터) 계호 스님이 만든 오색두부조림, 민들레 겉절이, 가죽전.(오른쪽 위부터) 에릭 브리파 셰프가 만든 애호박 샐러드, 민들레 샐러드, 버섯두부구이

그가 오후 요리 재료로 고른 것은 밭에서 막 따온 애호박과 표고버섯, 그리고 민들레, 씀바귀, 머위, 두부였다.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프랑스에서 가져온 제스터(과일의 껍질을 가는 칼)와 강판, 그리고 레몬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베르가모트, 딱딱하게 말린 검은 레몬, 레몬 과육을 으깨 만든 소스와 석류를 넣어 만든 소스였다.

“이 애호박의 신선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볼게요.”

그는 우선 애호박의 껍질을 두껍게 쳐낸 뒤 남은 속을 강판에 갈았다. 갈아놓은 호박 속에는 죽염과 고춧가루를 넣은 뒤 베르가모트를 잘라 즙을 더 했다. 껍질 부분은 잘게 채쳐 죽염을 뿌렸다. 죽염에 살짝 버무려 둔 호박을 접시 가운데 소복하게 놓고, 호박 속으로 만든 소스를 접시 가장자리에 둘렀다. 검은 레몬을 제스터에 갈아 그 위에 뿌리고는 실고추처럼 말린 피망을 얹어 마무리했다. 화사한 봄을 연상케 하는 진노란 애호박 샐러드가 뚝딱 만들어졌다. 애호박을 생으로 먹는 경우가 드문 편이라 맛이 궁금했다. 풋풋한 첫맛이 터질듯한 상큼함으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담백한 뒷맛으로 마무리됐다. 부드럽고 생기있는 애호박의 식감을 맛본 스님들은 “애호박을 생으로 먹는 경우는 처음인데 이런 상큼한 맛이 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에릭 브리파셰프가 애호박으로 신선한 샐러드를 만들고 있다. 브리파 셰프가 목에 건 메달은 프랑스 국가 공인 장인에게 수여되는 MOF 메달이다.

에릭 브리파셰프가 애호박으로 신선한 샐러드를 만들고 있다. 브리파 셰프가 목에 건 메달은 프랑스 국가 공인 장인에게 수여되는 MOF 메달이다.

이어 그는 큼직한 볼에 민들레와 씀바귀를 적당한 길이로 썰어 담았다. 여기에 참깨와 올리브오일, 간장을 넣은 뒤 직접 만들어 가져온 석류청을 두르고는 “민들레 잎은 주로 볶아서 사용했는데 여기선 샐러드로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소스에 채소를 버무린 그가 비장의 무기로 더한 것은 계호 스님이 미리 만들어 두었던 가죽부각이다. 가죽부각을 손으로 툭툭 쪼갠 뒤 민들레 샐러드에 섞으며 “식감을 더 좋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민들레 샐러드였으나 맛을 본 스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깔끔한 쓴맛과 가죽부각의 고소함, 여기에 석류청의 달큰함이 더해지면서 기분 좋은 감칠맛이 폭발했다.

마지막 메뉴는 그가 채마밭에서 따온 표고버섯과 계호 스님이 만들어 둔 두부를 사용한 ‘사찰식 단백질 요리’다. 버섯과 두부를 깍둑 썰어 손질한 뒤 기름을 조금 두른 팬에 노릇해지게 구웠다. 죽염을 중간중간 뿌린 뒤 웍을 팬에 엎어 고소한 냄새가 날 때까지 익혀 채수를 넣어 볶고는, 다시 자신이 가져온 ‘특제 소스’를 둘렀다. 그가 버섯 요리를 만들 때 주로 사용한다는 이 소스는 미네랄 워터와 레몬주스, 정향, 월계수 잎, 발효시킨 포도로 만든 것이다. 머위 잎을 가니쉬로 곁들이자 근사한 메인 요리로도 손색이 없다.

르 꼬르동 블루는 2020년부터 한국 사찰음식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가르치고 있다. 채식요리 과정에 사찰음식 수업이 한 학기에 1차례씩 연간 2차례 편성되어 있다. ‘미식’을 최고로 추구하던 데서 ‘전 생태계적 음식’으로 가치가 옮겨감에 따라 한국 사찰음식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브리파 셰프는 프랑스의 최고 셰프들이 참여하고 있는 단체(college culinaire de france)에 대해 언급했다.

“이 모임에서 추구하고 있는 3가지 원칙은 ▲자연 존중 ▲인근의 소규모 농상공인 보호 ▲우리 식재료를 알리는 문화 운동을 외국과 교류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한국 사찰음식이 추구하고 있는 철학이나 가치와도 상통하는 것이지요. 지구와 생태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만 제 건강에도 사찰음식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 고작 3, 4일 머무르며 사찰음식을 계속 먹었는데 지금 제 몸속에 있던 불순물과 노폐물이 한 2㎏은 빠진 것 같아요.”

에릭 브리파는 “한국 사찰음식이 추구하는 가치는 궁극적으로 요리하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상통한다”고 말했다.

에릭 브리파는 “한국 사찰음식이 추구하는 가치는 궁극적으로 요리하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상통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