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기사 Media report

[전국매일신문] [최재혁의 데스크席] ‘템플스테이(TempleStay)’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한국불교문화사업단
댓글 0건 조회 2,356회 작성일 23-09-01 09:33

본문

[최재혁의 데스크席] ‘템플 스테이(Temple Stay)’
  •  


새만금 잼버리가 끝난 후 보은 법주사에서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독일 스카우트 대원들 중 8명이 “스님들과 같은 삶을 살겠다”며 삭발을 자청해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이들의 삭발을 맡았던 법주사 부주지 각운스님은 인천국제공항을 찾아 독일로 귀국하는 대원들을 배웅하며 삭발을 한 대원 8명에게 한국으로 다시 와서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도록 2028년까지 5년 동안 사용 가능한 법주사 템플스테이 30일 무료 체험권을 전달했다. 액수로는 1,600만 원에 상당하는 이용권을 건네준 것은 출가의 뜻까지 밝히며 삭발한 대원들의 의지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였다.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공자님의 말씀이다. 몸과머리털, 피부는 부모에게서받은 것이니 훼손하지않는 것이 효의시작 이란 말이다. 고종32년(1895)11월17일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은일본의압력으로백성에게단발령(斷髮令)을내렸다. 고종이먼저머리를깎았고,뒤이어대신들도머리를깎았다. 백성들이들고일어났다. 머리를깎느니차라리목을베라고했다.

삭발은 본래 종교적 의식이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는 세속의 번뇌와 얽매임을 끊는 결단의 표시로 출가 수행자에게 머리를 깎게 했다.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솟아나는 번뇌와 닮았다 하여 무명초(無明草)라고 부르며, 삭발은 무명을 끊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인은 머리카락을 잘라 신에게 바쳤고, 초기 기독교와 중세 가톨릭에서도 수도자는 신에 대한 복종의 뜻으로 삭발을 했다.

우리 정치에서도 삭발이 하나의 독특한 정치 투쟁의 수단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삭발을 하는 데는 여야도,보수와 진보도 없다. 맨 처음 삭발을 한 정치인은 1987년 박찬종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면서다. 1993년 김영진 당시 민주당 의원은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해 협상장인 스위스 제네바까지 날아가 삭발 투쟁을 펼쳤다.

여야 대립이 격렬해지는2000년대 이후 정치인 삭발은 유행처럼 번졌다. 2004년 설훈 당시 민주당 의원(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처리 반발), 2007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3명(사학법 재개정 요구), 2010년 충청권 의원6명(신행정수도 수정안 반대), 2013년 통합진보당 의원5명(정당해산심판 청구 반발)등의 삭발이 이어졌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를 거치면서 삭발은 저항의 상징이었다.

필자도 삭발을 했다. 첫번째는 중·고교를 다닌 덕분이었다.그 시기 남학생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면 머리부터 삭발에 가깝게 잘라야 했다. 그리고 일제 잔재물이라 할 제복에 다름없는 검정 교복을 입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두번째 삭발은 고교 졸업 무렵이었다. 지긋지긋한 민머리 신세를 벗어나려고 졸업도 하기 전에 학교가 정한 규정 이상으로 머리를 길렀더니 학생주임이 여지없이 바리깡이라는 기계로 머리 한가운데를 밀어버렸다. 논산훈련소에 가면 제일먼저하는 것이 삭발이다.

불교 인과경에 ‘부처님은 출가하여 궁을 나오자마자 머리와 수염부터 깎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제 머리를 깎았으니 일체 번뇌와 업장(業障)을 끊어주소서’라고 서원했다. 경전은 부처님의 출가 삭발을 성스러운 일로 적어놨다. 그로부터 삭발은 계율이 되었다. 불교에선 마음속의 번뇌가 머리카락으로 자란다고 여긴다. 이렇듯 여러 가지 뜻이 담겼기에 삭발은 불교의 주요 의식 전통이 되었다. 삭발은 출가이며 과거와의 단절이다.

새만금 잼버리대회에 왔던 독일 대원들이 법주사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그 중8명이 자청해 삭발을 했다. 총중엔 아예 출가 스님이 되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료를 기원하는 스님의 법문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초발심(初發心)의 깊이야 알 수는 없지만 벽안의 청소년들이 ‘K수행자’의 삶을 본받겠다고 나서다니! 딱히 종교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가상하여 미소를 짓게 한다.

지난 월드컵 기간중 33개의 전국 유명사찰에서 시행한 ‘템플 스테이(Temple Stay)’이다. 템플스테이가 처음 생긴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서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일본에 비해 경제력·인지도 등 여러 면에서 부족했다. 취약한 관광 인프라, 특히 숙박시설 부족이 큰 문제였다.

폐영식 다음날 법주사를 찾은 34명의 대원은 사찰예절을 배우고 새벽 예불과 타종에도 참여하며 한국 불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스님들이 삭발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자 남자 대원 6명과 여자 대원 2명이 “스님처럼 살고 싶다”며 삭발을 요청했다는 것. 출가의 뜻을 밝힌 대원도 있었으나 이루진 못했다.

미성년자의 경우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한다. 번뇌와 욕망을 일으키는 어리석음의 풀이라는 뜻이다. 출가 수행자들이 보름마다 하는 장엄한 삭발의식은 번뇌 단절의 의지다. 템플스테이가 생기기 전 사찰수련회 기사의 단골 제목은 ‘짧은 출가 큰 깨달음’이었다. 잼버리 대원들에게도 이번 템플스테이 경험이 큰 깨달음으로 오래 남기를 바란다.

템플스테이가 불자(佛子)이외에 일반인에게도 관심을 끌게 된 시기는 대략 2000년 초반부터다. 템플스테이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산사는 미지의 공간, 가까이 하기에 먼 신비의 장소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속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낯선 단어였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요, 포용의 종교다. 자칫 큰 실망만 안고 돌아갈 뻔했던 그들에게 한국불교는 자비와 포용을 근간으로 전세계의 청소년들에게 ‘감동을 주는 종교’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jhchoi@jeonm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