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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먹방시대 공양을 생각하다] 2. 불전 미술 속 부처님의 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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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불교문화사업단
댓글 0건 조회 3,793회 작성일 22-05-1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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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 버리고 중도로 성불하는 분기점…수행자의 정체성 상징


모든 경전 첫 머리서 ‘걸식’ 언급해…공양은 승가의 중요한 일상 의례 

‘사천왕봉발’ 에피소드는 음식 취하는 과정의 형식·의미 강조한 일화 

업보윤회설 믿던 인도인에게 공양은 보시 공덕 짓는 재가불자의 의무


부처님 생애에는 공양과 관련된 중요한 순간들이 적지 않게 전해진다. 공양은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리고 중도로써 성불하는 분기점이 됐다. 또한 부처님은 공양에 있어 엄격한 형식과 계율을 제시함으로써 공양이 수행의 일환이며 승가의 정체성임을 표명하셨다. 재가불자에게도 공양은 공덕을 쌓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부처님 생애에는 공양과 관련된 중요한 순간들이 적지 않게 전해진다. 공양은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리고 중도로써 성불하는 분기점이 됐다.

또한 부처님은 공양에 있어 엄격한 형식과 계율을 제시함으로써 공양이 수행의 일환이며 승가의 정체성임을 표명하셨다. 

재가불자에게도 공양은 공덕을 쌓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날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보시한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1250명의 제자들과 머물고 계셨다. 식사 때가 되자 가사를 입고 발우를 지니고 사위성으로 들어가셨다. 성 안에서 탁발을 마친 후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마친 후 가사와 발우를 거두었다.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은 후 경전을 설하기 시작하셨다.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着衣持鉢] 사위성으로 들어가서 걸식한[入舍衛大城乞食] 이야기는 ‘금강경’ 첫머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유행(遊行)과 걸식은 부처님 당시 수행자의 중요한 일과였다. 걸식에 의존하지 않고 사찰 내부에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이후의 일이다. 


고대 초기 인도 사찰은 탁발이 가능한 민가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조용한 곳에 위치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행처는 차츰 민가와 멀리 떨어진 산 속으로 이동되었다. 영국, 일본,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간다라 사원지는 변화된 수행자의 일상을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든 채 걸식하던 일상이, 사찰 안에서 자체적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간다라 절터에 남아있는 3세기 이후 식당 유구는 이런 수행자의 일상 변화를 담고 있다.


조선왕조 성립에 중요한 공헌을 한 정도전(1342~1398)은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정도전이 저술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한 내용이 핵심이다. 불교의 윤회설, 인과설, 자비설, 지옥설 등을 비판한 정도전의 글 중에는 걸식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불씨(佛氏)는 처음에는 걸식하면서 먹고 살 뿐이어서 군자는 이것을 의로써 책망해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저들이 화려한 전당과 큰 집에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왕을 받드는 것처럼 한다.” 


정도전은 불교의 걸식이 의에 맞지 않는 행동이지만 이보다도 당시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가사’와 ‘발우’가 청정한 불교수행자의 상징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기도 하다. 


발우(鉢盂)는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시주받은 음식이 그릇에 맞게 보이기 때문에 응량기(應量器)·양기(量器)·응기(應器)라고도 한다. ‘능엄경’에는 아난이 응기를 가지고 성 안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했다는 내용이 있다(그림 1).


부처님의 생애 가운데 음식 공양을 담는 발우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사천왕이 부처님께 발우를 올린 사건이다. 그러나 고행을 포기한 부처님께서 성도 하기 전 기력을 회복하는데에는 수자타가 올린 우유죽 공양도 큰 역할을 했다. 부처님은 “나는 하루 깨 한 톨과 쌀 한 알을 먹었으며, 때로는 칠일 동안 그렇게 먹기도 했으니 몸이 야위어서 마치 마른 나무와 같다. 고행을 한 지 6년이나 되었지만 해탈을 이루지 못했으니 잘못된 길이다. 이제 내가 만약 이 마른 몸으로 도를 얻는다면 저 외도들은 굶주림이 바로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것이다. 고행을 포기한 뒤 몸을 회복한 뒤에 도를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고행을 그만 둔 부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네란자라 강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셨다. 그러나 몸이 너무 야위었기 때문에 스스로 나올 수가 없자 천신이 내려와서 나뭇가지를 내려뜨려 주었다. 그것을 잡고 부처님은 강을 나올 수 있었다. 


그때 숲 바깥에 소치는 여인이 있었는데 정거천이 내려와서 공양을 올릴 것을 권했다. 부처님은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받으면서 “나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음식을 받는다”고 기원했다. 우유죽을 드시자 몸에서 빛이 나고 기력이 회복되었다. 


독일 베를린 아시아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불전도는 오른쪽에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부처님의 고행, 고행을 그만두고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하자 천신이 내려와 나뭇가지를 내려뜨려 주는 장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는 이야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그림 2).


사천왕이 부처님께 발우를 바친 이야기는 성도 후 첫 설법을 하기 전에 일어난 에피소드로 ‘사천왕봉발(四天王奉鉢)’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성도 후 여섯 번째 칠일 동안 법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다. 마침 그때 두 상인이 근처를 지나다가 부처님을 발견하고는 음식을 보시했다. 부처님께서는 상인들의 음식을 받으면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발우를 지니셨는데 나는 이제 어떠한 그릇으로 이 음식을 받을까?’라고 생각하셨다. 그때 사천왕이 금발우를 부처님께 드리자 “출가의 법에는 금발우를 받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부처님은 거절하셨다. 이때 북방 비사문천왕이 다른 천왕들에게 말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옛날 청신천이 네 개의 돌로 된 발우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준 일이 있어요. 그때 변광이라는 천인이 와서 말하기를 ‘이 발우는 사용하지 말고 공양하면서 탑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미래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 이 발우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천왕은 저마다 돌발우를 가져다 부처님께 바쳤다. 그때 부처님은 ‘사천왕이 깨끗한 신심으로 나에게 발우를 보시하지만 내가 네 개의 발우를 받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그러나 만약 한 개만 받고 다른 세 개를 받지 않으면 나머지 왕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이제 네 왕이 바치는 발우를 모두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시고는 네 개의 발우를 받아 하나로 합쳤다. 


간다라 불전도 속 부처님께서 손에 든 발우에는 합쳐진 네 개의 발우를 상징하는 선이 그어져 있다. 부처님께서 들고 있는 발우 안엔 풍요의 상징으로 가득 담겨진 음식이 표현돼 있다(그림 3). 


사찰에서 발우공양 때 사용하는 네 개의 발우는 사천왕이 부처님께 바친 발우를 의미한다. 사천왕이 부처님께 바친 발우는 성도한 부처님의 첫 공양과 전법의 상징물로 차츰 자리잡아 갔다. 그후 불법이 전해지는 곳에 발우가 유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낳게 되었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과 현장 스님이 페샤와르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친견했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사천왕이 바친 발우는 성도한 부처님의 상징이자 음식을 받고 취하는 과정과 형식에 여법함이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일화다. 이러한 형식과 의미는 곧 승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발우가 불법 전승의 상징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부처님 당시 인도인들이 통속적으로 믿고 있던 교설은 ‘업보윤회설’이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통속적 관념을 믿고 있는 당시의 대중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준수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보시와 계율을 계속 실천하면 그 과보로서 하늘에 태어난다고 설하셨다. 이러한 업보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올리는 ‘원후봉밀(猿猴奉蜜)’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는 부처님께서 바라문의 식사에 초대받아 갔다가 기원정사로 돌아오는 길에 연못 주위에서 한 마리의 원숭이를 만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원숭이는 부처님의 발우에 꿀을 넣어 드렸다. 부처님은 그것을 물로 희석해 제자들 모두와 함께 나누어 드셨다. 원숭이는 너무 기뻐 춤을 추다가 발을 잘못 디뎌 구덩이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인연으로 부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라문의 아들로 인간계에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간다라 라호르박물관 불교실 중앙 홀에는 부처님께 꿀을 보시한 원숭이가 이야기가 새겨진 불탑이 있다. 왼쪽에는 주인공인 원숭이가 두 손으로 꿀이 든 발우를 들고 있다. 중앙에는 원숭이로부터 꿀을 공양받은 부처님이 표현되었다. 오른쪽에는 기뻐서 춤을 추는 원숭이가 등장한다(그림 4). ‘원후봉밀’의 이야기는 공양의 공덕을 잘 압축하고 있다. 


이처럼 ‘공양’은 부처님께서 고행을 멈추고 중도로써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 성도 후에는 출가자와 승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자 엄격하게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는 탁발과 공양이라는 형식 속에 출가자와 재가자를 이어주는 기능이 담겨 있는 동시에 출가수행자는 집착하지 않는 수행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가불자에게는 승가를 외호하는 보시공덕의 길이 공양을 통해 가능했다. 


유근자 동국대 강의초빙교수 

유근자 동국대 강의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