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신문] [사찰국수 기행] 21. 정관 스님의 '능이 배추 칼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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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이향 머금은 국수…산중잔치가 열린다
굳게 닫혔던 차의 문이 열리자 청명한 산 내음이 와르르 밀려온다. 백양산 자락에 흩뿌려지던 겨울비에 숲이 젖어가는 시간. 겨우내 옹크려가며 제 몸의 물기를 말리던 나무들은 비와 함께 그 농축된 생의 기운을 몇 곱이나 진한 향으로 반사한다.
붉고, 노랗고, 또 오래된 종이 마냥 빛바랜 낙엽이 켜켜이 쌓인 숲.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가 새겨진 그 수천수만의 편지가 비에 젖을 때, 온 산은 생의 내음으로 아득해진다.
모든 것이 잠들어 가는 혹한의 계절, 하지만 가장 열렬히 삶을 증명하는 이 겨울의 산을 찾아 오른다.
천진암을 찾아서
전라남도 장성, 하얀 양이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는 천년고찰 백양사. 그 고적한 산사의 곁을 지나 자박자박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인 천진암에 다다른다.
본래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수행처였으나, 이제는 전 세계인이 찾아오는 산중 명소가 된 천진암. 바로 사찰음식 명장 정관 스님(천진암 주지)이 계신 도량이다.
정관 스님은 지난 2017년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다큐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을 통해 일약 전 세계에 사찰음식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 하지만 그것은 부싯돌에 번쩍, 하고 불이 당겨진 찰나일 뿐, 스님의 삶은 이미 이곳 천진암의 공양간에서부터 아니 어쩌면 아주 멀고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요리하는 수행자’의 여정을 이어온 것과 다름없다.
고적한 전각과 대웅전이 여느 암자와 다르지 않은 모습. 하지만 법당이 내려다보는 볕 좋은 마당에 조르르 선 장독대가 음식을 통해 불법(佛法)을 전하는 이곳의 나날을 엿보게 한다.
산 너머 해가 가득 떠오르면 산사의 하루는 더욱 분주해진다. 천진암의 공양간이 열리고,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새로운 국수 이야기와 함께할 터다.
정관 스님의 겨울, 그 따뜻한 기억의 승소를.
그 어디에서 나에게로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국수 만드시는 것을 한 번 본 뒤로 혼자 밀가루 반죽을 하고, 국수를 내어 온 동네 사람들을 먹였다. 정관 스님 7살 무렵의 일이다. 그 후로도 음식 만들기는 절로 절로 손에 붙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요리 영재였던 셈이다.
“이번 생에 시작된 것이 아니에요. 다 전생의 수업으로, 그 인연으로 하는 것이지요. 어느 날 깨달았어요. 손끝으로 알게 됐어. 그저 남의 것을 배워서 따라 하다 보면 금세 고갈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고 말아요.”
전날 밤까지도 연일 강연과 템플스테이 등이 이어졌다는 정관 스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을 이른 시간이지만 스님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내가 좋으니까 하지, 누가 시켜서 하면 이렇게 못 했을 거예요(웃음).”
그런 스님이 준비한 오늘의 국수는 바로 ‘능이 배추 칼국수’. 미리 숙성시켜 두었다는 반죽은 뽀얗게 빛나고, 커다란 나무 도마를 세 개나 이어 면을 낼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곁에 놓인 오래된 나무 방망이 하나. 바로 정관 스님의 어머님이 쓰시던 국수 방망이다.
여전히 길이 잘 들어 보드랍고, 나뭇결을 따라 하얀 세월의 더께도 함께 얻은 방망이가 도마 위에서 춤을 춘다. 어머니의 손 위에 스님의 손을 얹은 듯이 하나가 되어.
생과 사를 넘어 전해지는 어떤 것은 맛으로, 이생을 밝히는 힘으로, 새로운 이야기로 그렇게 이어져만 가는 것이다.
음식, 그 이상의 교감
“능이 배추 칼국수는 주로 겨울에 먹는 음식입니다. 여름에도 몸이 허할 땐 이열치열 삼아 먹기도 하지요. 하지만 능이는 옛날부터 유명한 ‘감기국’ 재료입니다. 겨울 무와 땅에 묻어 두었던 배추를 함께 끓이면 아주 좋은 보양식이 되지요.”
능이 버섯은 그 독특한 향미와 함께 천식 같은 오랜 기침과 기관지염 등에 효능이 좋아 예로부터 약용식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능이 배추 칼국수는 감기 걸렸을 때 치유를 위해 한번. 또 감기가 나아갈 즈음 열을 내리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한번 먹곤 합니다. 그리고 국수 반죽에는 콩가루를 같이 넣어주지요. 산중에선 고기도 안 먹고, 또 두부 같은 식물성 단백질도 쉬이 구하기 어려웠어요. 그러니 콩가루를 통해 단백질을 섭취하는 겁니다.”
쉴 틈 없이 국수를 준비하는 중에도 스님의 가르침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여름과 겨울마다 달라지는 반죽의 비율, 손끝으로 알 수 있는 찰기의 정도. 그리고 마침내 비단처럼 펼쳐지는 반죽을 햇살에 비추어 면의 두께를 맞추는 방법까지도.
“만져봐요, 느낌이 참 좋지요? 너무 부드럽고 예뻐요(웃음).”
쓱썩쓱썩, 정관 스님의 잰 손놀림으로 완성된 칼국수 반죽이 펼쳐지는 순간 탄성이 터졌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반죽을 쓰다듬는 순간 묘한 생명력이 느껴졌다면 과한 착각일까.
어쩌면 ‘오이를 손질할 땐 오이가 된다’는 스님의 철학 때문인지도. 아니, 어느새 그친 비와 따사로워진 햇살에 내내 감사를 전하던 스님에게서 어떤 마법 같은 힘이 전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승소의 시간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스님의 곁에서 국수 준비를 돕는다. 가마솥 안의 물이 팔팔 끓어 오르면 겨울 무며 배추, 애호박, 능이 버섯까지 손으로 뚝뚝 떼어 넣고 한소끔 익혀준다. 잠시 후 채소가 적당히 익으면 준비한 면을 넣어줄 차례. 마침내 장작불과 가마솥이 구수한 내음을 거침없이 내뿜기 시작하면, 커다란 양푼에 옮겨 담고 재빨리 후원으로 향한다.
잠시 후 색 고운 동치미, 잘 익은 김장 김치와 함께 차려진 귀한 한 상. 발우에 담긴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자 찌르르 속이 데워진다. 채수의 감칠맛, 깊게 배어난 능이의 향과 콩가루가 들어가 씹을수록 고소한 칼국수의 조화란! 너나 할 것 없이 두 번째 그릇을 더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산중 잔치가 따로 없다.
“큰 절에 있을 때 이 국수를 먹는 날은 발우공양을 하지 않았어요. 그 날만큼은 솥단지를 떡하니 방 한가운데 두고, 어시 발우(발우 중 가장 큰 그릇)에 먹고 싶은 만큼 양껏 덜어 먹는 거예요. 배부르게 먹고, 편히 쉴 수 있는 저녁이었어요. 겨울철 별식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었지요(웃음).”
언제나 긴장을 놓치지 않는 수행 생활, 그중에 이 국수 한 그릇은 그만큼 뜨거운 여유를 전하는 선물이었다.
“하루 저녁이지만 제도 밖의 자유를 느끼는 겁니다. 그 자유로움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지요. 어떤 악기든 조율을 잘 해야 오랫동안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늘 팽팽히 매여만 있어선 제소리를 낼 수 없어요. 쉼 없이 자기 수행을 반복하면서도 가끔은 국수 한 그릇의 자유로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거예요. 음식은 그렇게 긴장된 자기 마음을 조율해 나갈 힘이 있습니다.”
달도 별도 잠에서 깨지 않은 그런 시간, 홀로 어둠 속에 나서 세상을 깨우고 뭇 생명을 위해 기원하는 수행자의 마음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추운 겨울 메마른 숲에 단비가 내리고, 또 그 숲이 전해주는 청아한 공기에 지친 숨을 틔우는 순간이면 문득 그 마음 끝에 닿는 것도 같다.
한 그릇 국수에 힘을 내어 깊은 새벽을 두려움 없이 맞이했을 이 땅의 뭇 수행자. 그 얼굴 위에 승소(僧笑)가 뜬다. <끝>
▶한줄 요약
가마솥 안의 물이 팔팔 끓어 오르면 겨울 무며 배추, 애호박, 능이 버섯까지 손으로 뚝뚝 떼어 넣고 한소끔 익혀준다. 채소가 적당히 익으면 준비한 면을 넣어줄 차례. 장작불과 가마솥이 구수한 내음을 거침없이 내뿜기 시작하면, 커다란 양푼에 옮겨 담는다.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자 찌르르 속이 데워진다.
재료 | 능이 버섯 적당량(하루 전에 미리 불려놓을 것), 밀가루(8) : 콩가루(2), 배추, 애호박, 무, 건고추, 들기름, 소금, 집 간장
만드는법 |
① 분량의 밀가루/콩가루에 집간장, 들기름 약간, 그리고 굵은 소금을 미지근한 물에 녹인 것을 조금씩 부어가며 반죽을 해준다.
겨울에는 반죽이 빨리 굳으므로 약간 물렁 하게 반죽해 주는 것이 좋다.
② 동그랗게 뭉친 반죽에 손가락을 넣어 반죽의 8부 정도 들어가면 1~2시간 정도 실온에서 숙성시킨다. (겨울 기준)
③ 숙성된 반죽은 잘 펴준 뒤 썰어주는데, 이때 반죽을 세 부위로 나누어 굵은 면, 중간 굵기 그리고 얇은 면으로 나누어 잘라준다.
④ 끓는 물에 무, 무청, 배추, 능이버섯을 한입 크기로 뚝뚝 썰어 넣고, 건고추도 함께 넣어 팔팔 끓여준다.
⑤ 채수가 끓고 야채가 적당히 익으면 굵은 면→중간→얇은 면 순서대로 넣어 익힌다.
⑥ 소금을 더해 간을 맞춘 뒤, 면이 잘 익으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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